저는 문구덕후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핫트랙스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이고, 마음에 상했거나 편하지 않을 때는 그곳을 갑니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문방구 주인이 되는 게 꿈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펜과 종이, 스티커, 스탬프, 그리고 다이어리. 어쩜 그렇게 매년, 매달 새롭고 이쁜 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년 11월, 12월은 중요한 달입니다. 다음 해에 사용할 다이어리를 고르는 달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물욕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것도 이쁘고, 저것도 이쁘고, 이 다이어리를 사면 더 계획적으로 살 수 있을 거 같고, 저 다이어리를 사면 빵빵하게 잘 꾸밀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올라옵니다. 이 때만큼 물건을 살 때 신중해 지는 적이 없습니다. 지금 고르는 다이어리가 저의 1년 메이트가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월 말쯤 다이어리가 도착하면 기대에 부풀게 됩니다. 새로운 해를 새 다이어리와 맞이하는 기분. 모두 아시죠? 다이어리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벌써 새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치만 그 기분이 오래 가나요~ 제 책상 옆에는 작년, 재작년에 쓰다 남겨진 헌 다이어리들이 쌓여있습니다. 페이지는 절반도 못 채웠네요. 앞 부분만 잔뜩 힘줘서 꾸며진 헌 다이어리들을 보고 있으면, 고등학교 때 수학의 정석이 생각납니다. 집합 부분만 새카맣게 변한 그 책과 헌 다이어리 말입니다. "헌 다이어리 줄게 새 다이어리 다오~" 를 벌써 10년 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21년을 맞이하며 어김없이 다이어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여느 해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40살이 되었으니까요. 40은 불혹이라고도 불립니다.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나이라고 합니다. 21년에 저는 다이어리에 대한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버렸나봅니다. 어떤 다이어리를 사도 끝까지 채우지 못하리라는 이치 말입니다. 저를 알아버리니 다이어리 구매 버튼도 쉽게 눌러지지 않았습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이런 저의 마음을 알았나봅니다. 연말에 저에게 불렛저널을 추천 영상으로 올려주더라구요. (아래 영상)
부랴부랴 유튜브 검색창에서 불렛저널을 입력하였습니다. 역시나 이쪽도 고수들은 넘사벽이었습니다. 그치만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모눈종이와 검정펜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까요. 예전에 사두었던 미도리 MD 노트 라이트 (S)를 예전에 주문했던 ROPS 가죽커버에 끼웠습니다. 딱 맞았습니다! 두껍지도 않고, 얇지도 않은 딱 적당한 두께. 새우깡처럼 손이 자꾸만 가는 사이즈와 두께와 감촉이었습니다. 필통에 있던 Uni-Ball 시그노 0.38mm를 꺼내서, 위의 영상을 참고하여 불렛저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2주밖에 안되서 불렛저널에 정착했다고 말하기는 부끄럽습니다. 그치만 제가 불렛저널을 만지는 빈도라든지, 펴보는 횟수 등을 감안해 볼 때 앞으로도 계속 불렛저널을 쓸 것 같습니다.
불렛저널이 좋은 이유는 페이지를 순서대로 채워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렛저널의 창시자인 라이더 캐롤은 어렸을 적 ADHD를 진단받았습니다.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고 쉽게 관두는 모습이 마치 제 모습과 같네요. 수년간의 착오 끝에 만들어낸 불렛저널은 다이어리를 끝까지 사용한 적이 없던 저 같은 사람에게도 딱 맞았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페이지가 마음에 안들면 페이지를 넘겨 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인덱스에 페이지 넘버와 그 페이지의 제목만 남겨두면 됩니다. ) 쓰다만 페이지가 신경이 쓰이면 다시 그리로 넘어가서 이어서 쓰면 됩니다. 다이어리를 쓰다가 관두는 경우는 페이지를 차곡차곡 채우지 못하고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설레임은 오래 가지 못하고, 앞으로 채워야 하는 페이지 때문에 막막하기만 하죠. 불렛저널은 그런 부담감을 줄여주었습니다. 순서대로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불렛저널은 얇은 수첩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미도리 MD 노트 라이트 (S) 24장 X 3권 입니다. 2사이즈는 가로 105mm X 세로 148mm X 두께 3mm 입니다. 제 손이 작아서 쏙 들어오지는 않는데 한 손에 쥐기에 부담스러운 사이즈는 아닙니다. 펄럭펄럭하는 느낌도 좋고 여기 저기 금방 채워진다는 착각이 들어서 쉽게 쉽게 불렛저널을 쓸 수 있습니다.
불렛저널을 SET-UP 한 뒤에는 당분간 다른 사람의 저널은 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엄청난 내공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기죽을 수 있습니다. 내 페이스에 맞게 이런 저런 실험을 하면서 쓰다보면 꽤 그럴싸한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지금 제 불렛저널이 그렇습니다. 제 눈에 아주 이쁘고 멋있거든요.
2021년에 새로 시작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블로그도 그렇고, 새로운 자격증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렛저널도 새로 시작하였습니다. 불렛저널 덕에 블로그, 자격증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작심삼일은 일단 넘겼습니다. 2021년 12월 결산이 조금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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